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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子 / 十
それは古びた宝石箱に入っていて、
みすぼらしいものでした /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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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재미 없지…. 나갈까?
1990. 10
낭만적이잖아. 내 편지 평생 보물로 삼아도 돼.
쪽지도 편지의 한 종류라고 볼 수 있지.
그냥… 네 얘기 좀 한 게 전부라니까 그러네.
아무리 그래도 편지에 뺨 맞은 얘기는 못 써!
널 잘 모르겠어. 특히 일본어를 쓸 땐 특히!
1991. 07
말을 싸가지 없게 한다고 화내서 미안. 말이 안 통한다고 무시한 것도 미안. 너같은 건 주먹 한 번이면 끝이라고 한 것도 미안. 어물쩡 넘기려고 해서 미안. 죽은 말에 채찍질 하는 것 같다고 해서 미안. 어깨에 기댔을 때 피해서 미안…. (그런데 너도 사과해!)
1991. 11
어제 내 꿈이 뭐냐고 물어보려고 했지? 넌 말이 많은 편도 아니면서 하고 싶은 말까지 참더라. 너무 조용해서 가끔은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까지 들어. 하지만 걱정 마! 난 남자다운 척을 하느라 수다떠는 걸 싫어하는 척 하고 있거든.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라는 말 알고 있겠지? 네가 침묵을 지키니 나는 웅변을 해볼게.
난 어릴 적부터 선박설계를 배우고 싶었어. 우리 아버지께선 낚시를 참 좋아하셨는데, 그 영향일까? 까맣게 탄 피부로 씩 웃으며 어제 잡은 물고기의 종류와 크기를 자랑하는 모습이 얼마나 멋져 보였는지 넌 모를 거야. 아버지께 괜찮은 배 한 척 만들어 드리는 게 내 꿈이었지. 머리가 크고 나니 컨테이너선을 만들어 드리고 싶은 마음도 들더군.
그래, 난 욕심이 무척 많았어. 중간 과정은 생략하고 막무가내로 유학을 가겠다며 배를 타고 정처없이 떠돌다 이 도시에 오게 됐지. (왜 유럽이 아니라 미국으로 왔는지는, 글쎄, 묻지 말아 줘. 삶은 늘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니까) 심지어 디프로스에는 바다가 없어서 기술을 배우기에 적절하지 않았어. 하지만 거지 꼴이라 다른 곳으로 떠날 수도 없었지.
물론 처음엔 힘들었어. 하지만, 너도 알고 있듯, 내 장점은 적응이 빠르다는 거니까.
가끔은 고향이 그립기도 해. 디프로스에는 바다가 없잖아? 우리 동네는 바다가 정말 가까워서 뛰쳐나가면 포말을 밟으며 놀 수 있었거든.
하지만 여기 와서 좋은 점도 있어. 너같은 여자애는 우리 동네엔 없었으니까 말이지.
이제 궁금증이 해결이 됐어?
1991. 12
넌 너무 폭력적이야.
1992. 02
너한테 맞은 데는 보험 처리 안 될까?
일확천금의 기회일지도 몰라.
요즘 괴담 이야기가 많이 돌잖아? 그게 가짜가 아니라 진짜라는 이야기도 있고, 실제 목격자도 나오고 있고…. 이 땅이야 뭐, 원체 위험한 곳이지만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아. 이런 때일수록 조심해야 해, 이치코.
1992. 08
솔직히 처음엔 깜짝 놀랐어. 더 솔직하게 말하면 오줌 지릴 뻔 했어. 남자답지 않다고 욕해도 싸.
미안해. 깜짝 놀라서 뛰쳐 나오긴 했지만 혼자 천천히 생각해 보니 네가 자꾸 뭘 숨기려 했는지 이해가 됐어.
네가 어떻게 생각할 지는 몰라도…노력해 볼게.
1992. 12
종류를 불문하고 길거리에 뒹구는 시체가 너무 많아. 익숙해질 법도 한데 역겨워…. 요즘 돌아다니는 낯선 사람들은 사냥꾼이라고 하더라. 어 쩌다 대화를 하게 됐는데, '특이하게' '예쁘게' '희소성 있게' 생길수록 인기가 많대. 그 기준은 대체 누가 세우는 거지?
1993. 02
‘총 소리에 일일이 놀라는 사람은 없는 땅’이라는 농담이 통하는 곳이지만, 오늘은 유달리 정도가 심하더군. 내가 얼마나 네 걱정을 했는지 모를 거야. 하루가 멀다 하고 무시무시한 소문이 들리고 신문에는 끊임없이 부고가 실리지….
이치코. 난 유럽으로 떠나려고 해. 돈을 꽤 모았고, 이제는 공부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 드디어 바닷가를 거닐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려. 너만 괜찮다면… 같이 갈래?
1993. 03
아버지의 부고를 들었어. 잠시 고향에 다녀올게.
같이 가고 싶지만 역시 안되겠지…. 위험한 시기니까 조심해야 해, 이치코.
1993. 04
여긴 바닷 바람이 꽤나 차가운데, 그쪽도 마찬가지겠지? 장례식은 다 끝났어. 상속 문제로 고생을 꽤나 했지. 터무니없게 적은 재산인데도 이렇게나 일이 커지다니, 다들 먹고 사는 게 힘든 모양이야…. 일이 다 해결되면 정리하고 다시 돌아갈게.
1993. 11
…오랜만에 널 만날 생각을 하면서 기대에 부풀어 비행기를 탔어. 그런데 아무리 길을 돌아도 아는 이정표가 나오질 않잖아. 당황해서 차에서 내려 지도를 살펴 보는데, 남루한 차림의 남자가 보이는 거야. 그에게 말을 걸었지. 그 남자는 자기가 사냥꾼이며, 사냥을 하기 위해 팀을 꾸렸는데 와해 되었다고 하더군. 나는 차를 태워준다고 하면서 그에게 안내를 부탁했어. 차를 타고 디프로스 안으로 들어가면서 온갖 이야기를 다 했지. 원주민들이 떼죽음을 당했다는 이야기, 사냥꾼들이 슬금슬금 기어 들어온다는 이야기, 그걸 막기 위해 광역 착시 마법을 걸었다는 이야기, 금제의 마법에 대한 이야기…. 너는 인간은 아니지만 외형만 봐서는 착각할 만 하니까 이 일에 휘말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네가 겨울 잠을 자겠다고 했던 게 떠올라서 네 '거처' 들을 순회했지. (그거 좀 줄일 생각은 없는 거야?…)
…아무튼, 자는 얼굴이라도 볼 수 있어서 다행이야. 잘 자, 이치코.
추신. 잘 땐 마법이라도 좀 쓰는 게 어때? 여자가 혼자 지낸다는 건 말야, 네 생각 이상으로 위험하다고!
1995. 02
내가 그 편지를 썼던 게 꼭 옛날 일 같아. 4년쯤 전이던가? 그럭저럭 긴 시간이라면 긴 시간이고, 짧은 시간이라면 짧은 시간이군. 나는 지금 영국에 왔어. 섬나라라서 다른 나라에 비해 선박 구경하기가 쉽거든.
─하고 큰 소리를 뻥뻥 치고 싶지만, 사정 때문에 유학은 물 건너 간 지 오래고, 삼촌께서 신문사 일을 하고 있으니 와서 사진사 노릇이라도 해 보는 건 어떻느냐고 하셔서 온 거야. 어릴 땐 큰 배를 만드는 상상을 쉽게 하곤 했는데.
이치코. 건강하게 지내길. 앤드류가 네 근황을 궁금해 해.
1995. 05
지금 이 엽서에 그려진 배 그림, 멋지지? 이 그림에 얽힌 근사한 얘기를 해줄게. 우연히 기념품 샵에 들렀는데 마침 엽서 코너가 마련되어 있더군. 최근 네게 편지를 쓰지 않은 게 기억났어. 난 단숨에 이 엽서를 골랐지. 그런데 옆에 있는 남자가 말을 걸더라. 왜 프랑스에 와서 촌스러운 덴마크 엽서를 고르느냐고 말이야. 난 그에게 대답했지. ‘촌스럽다니, 그런 실례를! 난 스벤보르 증기선사의 팬이거든요.’ 우린 이상할 정도로 말이 잘 통했고, 종류를 불문하고 설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지. 얼마나 즐겁던지 커피 한 잔 살 정도였다니까. 남자는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위트 있는 농담을 했어. 그의 견식을 짐작할 수 있었기에, 그의 정체가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지. 오랜 대화를 나눈 뒤에 그 남자가 떠나며 이렇게 말하더군. ‘이렇게 즐거운 대화를 하다니, 꼭 소년 시절로 돌아간 것 같군요. 나중에 연락 주시오.’ 그가 명함을 건넸지. 나는 너무 놀라 멍청이처럼 입을 벌리고 말았어. 이치코, 그가 찰스 베이커라면 믿겠어? 아직도 심장이 두근두근거려.
그가 내게 천천히 공부를 하래. 일거리를 주겠다고도 했어. 내가 원하던 부서는 아니지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기 마련이니까.
이건 다 네 덕분이야.
1996. 02
2천년의 시작이야. 한 세기가 끝나다니! 허망하게도 오늘도 해가 떴네. 이치코, 잘 지내길.
2000. 01
나 여자친구 생겼다. 크흠. 이름은 데이지야. 왠지 너한테는 말하고 싶네.
추신. 이런 말 하는 거 별로야…?
2000. 02
데이지랑 헤어졌어.
젠장. 해가 뜨기도 전에 우체국에 왔는데… 이미 수거했다니! 차라리 분실되기를.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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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봤어? 찰스 베이커를 믿었는데, 그런 소송에서까지 저속하게 굴 줄이야! 더이상 참을 수 없더군. 난 다음날 바로 사표를 냈어. 데이지가 크게 화를 냈지.
그녀와는 헤어졌다가 만났다가 하는 중이야. 내가 너무 행동파라서 감당하기가 힘들대. 처음 만났을 때는 그 점이 좋다고 했었는데… 아무튼, 여자들 마음은 알다가도 모르겠어. …
2004. 02
데이지에게 연락이 왔어. 나는 장미꽃 한 송이를 들고 그녀를 찾았고(잘했다고 칭찬해 줘도 돼.), 약속 장소는 작은 카페였어.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수척했어. 투병 중이라고 하더군. 신이 원망스러웠어.
슬픔이 가시기도 전에 그녀가 또 믿을 수 없는 말을 하더라. 내게 일곱 살짜리 딸이 있다고 말야. 그녀 혼자 아이를 키우려고 했지만, 시한부 선고를 받아 그럴 수 없게 됐다고 하더군. 크게 놀랐지. 이치코, 난 바로 은행으로 달려가 적금을 모조리 깼어. 그녀의 이름으로 병원비를 입금했고, 공중 전화로 달려갔지. 그리고 빠른 시일 내에 아이를 만나고 싶다고 했어. 데이지는 힘 빠진 소리로 웃었는데,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몰라…. 난 내일 그 아이를 만나 보기로 했어. 솔직히 말하면 자신이 없지만… 힘낼게.
너에게 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2007. 08
편지 쓰는 게 유달리 오랜만처럼 느껴지는데,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난 데이지가 떠난 후에 고향으로 돌아왔어. 앤드류가 창업을 해서 손을 보태기로 했었거든. 중간에 파산할 뻔하기도 했지만… 뭐, 그럭저럭 굴러가고 있어. 아이는 잘 자라고 있으니 걱정 마. 처음엔 나만 보면 울음을 터트리더니 이제는 꽤 반겨 줘. 그저께는 내게 인터넷에서 본 괴담을 알려줬고, 어제는 이름을 바꾸고 싶다고 하더군. 언젠간 이 애가 나를 아빠라고 부르는 날도 올까?
추신. 핸드폰이 생긴다면, 꼭 연락 줄 것.
추신 2. 그 괴담 말야, 이름이 너랑 똑같던데… 너 혹시…?
2010. 09
이치코, 디프로스는 여전히 사라져야 할 것들의 무덤이야? 넌 거기에 혼자 있어? 혼자가 된 뒤에야 널 생각해낸 날 용서해 줘. 얼마 전에 아들이 죽었어. 난 아주 건강하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다만 12년만의 연락이라 나를 잊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내 사랑은 디프로스에 있었고 난 그걸 기억해. 네가 너무 슬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건강하길. 다음에 또 엽서 보낼게.
2022. 03
난 정말 깜짝 놀랐어. 네가 답장을 보내지 않는 건 늘 있던 일이니까 별 일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내 생각이 너무 짧았지. 디프로스는 내가 처음 떠나 있던 시기만큼이나 격변했더군…. 너를 찾아 도시를 돌아다니고 있으니 웬 말쑥한 인간 무리가 내게 접촉해왔어. 그들은 ‘그 여자와 아는 사이요?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소?’ 라고 물었지. 아마도 내가 꽤나 협조적인 미국인처럼 보인 모양이야. 내가 너에 대해 뭔가 알고 있었다면 교묘하게 대답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슬프게도 난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 모른다고 진솔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지….
‘무슨 관계인가요?’ 라는 질문에 내가 뭐라고 말했는지 상상이 돼? ‘오, 아무 관계도 아닙니다. 그저 그녀는 제 첫사랑이었거든요….’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웃더라. 따라서 웃었지만 사실은 가슴이 터질 것 같았어.
지금 난 네 생사도 알 수 없는 채 돌아가지만… 만약에 아직 네가 살아 있다면 말이야… 나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꼭 알려줘. 난 고향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네가 부르면 돌아올게.
무슨 말을 적어야 좋을까? 건강하라거나, 잘 지내라거나, 그런 상투적인 말 말고 다른 말을 적고 싶군. 하지만 그런 말로 전할 수밖에 없는 마음도 있다는 걸 너도 알고 있지?
건강해, 이치코. 잘 지내.
또 편지할게.
2023. 02